최근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의학 학술지들에 실린 코로나19 관련 논문이 연이어 철회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논문 저자들이 철회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1812년 창간된 의학 학술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의 홈페이지. /사진=NEJM 홈페이지
1823년 창간된 의학 학술지 랜싯(Lancet)의 홈페이지. /사진=랜싯 홈페이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NEJM)과 랜싯(Lancet). 각각 1812년과 1823년 창간돼 2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권위 있는 의학 학술지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전 세계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논문이 얼마나 많이 인용됐는지를 수치로 나타낸 `영향력지수(Impact Factof·IF)`에서 2018년 기준 NEJM은 70.670, 랜싯은 59.102였습니다. 대표적인 과학 저널 사이언스와 네이처는 각각 41.063, 43.070을 기록했죠,
◆어떤 논문이 철회됐나
지난달 22일 랜싯은 코로나19 환자에게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나 클로로퀸을 처방하면 사망 위험도가 높아진다는 연구 논문을 게재했습니다.
하이드록시클로로퀸, 익숙하시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게임 체인저`라고 극찬한 말라리아 치료제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복용하고 있다"고 밝혀 논란이 일었습니다.
논문이 게재된 후 트럼프 대통령은 약 복용을 멈췄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치료제의 효능·안전성을 실험하는 `연대 실험`을 잠정 중단하기도 했죠. 권위 있는 학술지 랜싯에 실린 연구 결과였기에 국제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파장을 일으킨 이 논문, 결국 데이터가 잘못됐다는 것이 드러나 철회됐습니다.
랜싯에 이어 NEJM도 `전환효소(ACE) 억제제 등 심장질환에 사용하는 약물이 코로나19 환자의 사망 위험도를 높이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철회했습니다. 랜싯과 NEJM에서 연이어 논문이 철회되면서 과학계는 술렁였습니다. 일각에선 학술지에 논문을 싣기 전 게재 여부를 검토하는 `동료 평가` 시스템이 무너진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죠.
◆범인은 바로 너!
조사 결과 논문에 활용한 `데이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랜싯과 NEJM에 실린 두 편의 논문 모두 `서지스피어(Surgisphere)`란 기업이 코로나19 환자들을 분석한 데이터를 제공했습니다.
랜싯에 게재된 코로나19 관련 논문에 대해 터키 언론인 TRT 월드와 인터뷰 중인 서지스피어 창업자 사판 데사이. 논문이 공개된 후 데이터의 신빙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그는 "데이터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내 뜻을 곡해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죠. /사진=유튜브 캡처
서지스피어는 혈관 외과의사인 사판 데사이가 2008년 창업했습니다. `데이터 분석 업체`라는 데사이 대표의 소개와 달리 이 기업은 교과서를 발간하는 의료 교육 기업으로 설립됐죠.
서지스피어는 가디언지의 탐사보도로 그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랜싯에서 철회된 논문에서 서지스피어는 자사와 제휴를 맺은 1200개 병원 중 6개 대륙 671개 병원을 대상으로 9만6000여 명의 코로나19 환자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했다고 밝혔습니다. 서지스피어가 수집했다고 주장한 호주 임상시험 데이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가디언지가 멜버른과 시드니 소재 병원들에 연락한 결과 이들 병원은 서지스피어란 기업을 들어본 적도, 이곳과 협업한 적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복용 중단, WHO의 임상시험 잠정 중단으로 이어진 연구가 뒤늦게 잘못된 데이터에 기반한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NEJM에 게재된 논문도 유사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데사이 대표는 두 논문 모두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닫혀버린 서지스피어 홈페이지. 가디언지 등의 탐사보도가 이어진 후 서지스피어 홈페이지는 폐쇄됐습니다. /사진=서지스피어 홈페이지
서지스피어 공식 트위터 계정도 폭파됐죠. 의혹이 제기되자 데사이 대표가 서지스피어 공식 계정을 모두 닫고 잠수를 타버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진=트위터
서지스피어는 말 그대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갑툭튀` 기업입니다. 외신 보도를 종합해보면 랜싯과 NEJM에 논문이 게재됐을 때 서지스피어의 직원 수는 1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일부 직원들은 과학, 통계학 분야에서 종사한 경험이 전무했죠. 과학 에디터로 등재된 직원은 공상과학소설 작가였고, 마케팅 임원으로 소개된 직원은 성인용 콘텐츠 모델이었습니다. 데사이 대표는 서지스피어가 `쿼츠클리니컬`이라는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을 사용했기에 직원 수가 많을 필요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프로그램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보니 그의 해명은 오히려 의혹을 더 키웠죠.
데사이 대표는 앞서 여러 기행으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서지스피어 창업 전 블로그를 만들곤 공상과학소설을 쓰겠다고 한 적도 있고, 2008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통해 `인간의 능력을 증진시켜주는 차세대 장치`로 소개한 `뉴로다이내믹스 플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며 모금 활동을 하기도 했죠.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이 장치로 그는 수백 달러를 모으는 데 그쳤고, 실제 제품화로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랜싯과 NEJM에서 철회된 두 논문은 만디프 메라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논문이 철회된 후 메라 교수는 성명을 통해 사과했습니다. 그는 "팬데믹 동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발표하길 원했을 뿐"이라고 덧붙였죠.
◆쏟아지는 코로나 연구…검토할 시간 부족?
중국 우한에서 첫 발병 보고가 이뤄진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WHO가 `뒤늦게` 팬데믹을 선언한 후 각국이 총력을 다하고 있지만 코로나19는 대륙별로 대유행을 일으키면서 확산되고 있죠. 코로나19가 확산되며 전 세계는 보건당국과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코로나 확산 속도를 최대한 늦추면서 동시에 치료제·백신 개발에 집중한다는 전략입니다.
각국이 촌각을 다투며 연구를 진행하고, 관련 논문을 발표하다 보니 누가 더 의미 있는 논문을 빨리 발표하는지를 두고 일종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통상 연구 논문을 하나 작성하는 데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학술지 편집진과 해당 논문 게재 여부를 평가하는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게재 전 `동료 평가`를 받고 결함이 없도록 논문을 보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학술지의 권위는 철저한 `동료 평가` 덕분입니다. 연구자들로선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깐깐한 검증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를 통과한다면 그만큼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죠.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특히 동료 평가는 과학 연구의 질(質)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연구자가 학술지에 논문을 접수하면 편집자들은 해당 분야 전문가 3명 이상에게 원고(논문)에 대한 의견을 듣는데, 평가자들의 서면 평가는 저자에게 논문의 수정을 요청하거나 학술지 측에 논문 게재를 거절(reject)하도록 요청할 수 있습니다. 2011년 방한한 리처드 호턴 랜싯 편집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전반적인 논문 게재 거절률은 95% 정도로, 논문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은 2~3년에 한 건을 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코로나19 논문이 단기간 동안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대로 된 동료 평가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논문이 밀려들다 보니 결국 꼼꼼한 검토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한 호턴 편집장과 에릭 루빈 NEJM 편집장은 팬데믹 이후 랜싯엔 평소보다 3배 많은 논문이 밀려들고 있고, NEJM의 경우 소논문을 포함해 하루 약 200편의 논문이 들어온다고 밝혔습니다.
호턴, 루빈 편집장은 "코로나19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을 빨리 게재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며 "새로운 논문을 통해 고통받는 코로나19 환자들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는 치료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꼼꼼한 동료 평가가 필요한 것은 알지만, 코로나19 치료제·백신이 없는 가운데 모두가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해명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동료 과학자들이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기도 어려운 데다 이들이 연구에 사용한 원본 데이터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점도 덧붙였습니다.
학술지의 권위는 철저한 `동료 평가` 덕분입니다.
연구자들로선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깐깐한 검증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를 통과한다면 그만큼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죠.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마샤 에인절 전 NEJM 편집장은 NYT와 인터뷰하면서 "항상 속도와 정확성의 균형을 잡는 부분에서 고민을 한다"며 "늘 정확성을 더 중시 여겼지만 현재 팬데믹 상황에서 이 균형은 정확성에서 속도로 크게 기울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다시 권위 있는 학술지로서 인정받으려면 동료 평가 등 검증 과정 재정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롬 카시러 전 NEJM 편집장은 외신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